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피부과 의사가 되기까지, 마음의 온도를 배우다

나눔으로 2025. 12. 12. 19:33

예린이의 하루 일기 같은 동화

피부과 의사가 되기까지, 마음의 온도를 배우다

예린이는 요즘 하루가 끝나면 꼭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.
“오늘 나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봤을까.”
이 질문은 성과를 묻는 질문도, 능력을 따지는 질문도 아니었다.
사람을 ‘대상’이 아니라 ‘존재’로 대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.

오늘 진료실에는 유난히 말이 없는 환자들이 많았다.
피부 상태는 차트에 적힌 대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,
마음 상태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았다.
예린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.

오전 진료의 마지막 환자는 노인이었다.
손등에 잡티가 많았고, 피부는 얇고 쉽게 상처가 나는 상태였다.
예린이는 진료를 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.
그 순간,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.
“이 손으로 평생 일했어요.”

그 한 문장은
수십 년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.
예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.
대신 손을 놓지 않았다.
그 침묵이 가장 필요한 답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.

점심시간이 지나고,
예린이는 잠시 휴게실에 앉아 물을 마셨다.
컵을 쥔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.
육체적인 피로보다
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
마음의 피로가 더 컸다.

그럴 때마다 예린이는
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.
시험 결과보다
집에 돌아와 일기장에 솔직한 마음을 적던 아이.
그 아이는 늘 이렇게 썼다.
‘오늘 나는 최선을 다했는지 모르겠지만,
도망치지는 않았다.’

그 문장은
지금도 예린이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.

오후 진료가 시작되자
한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.
피부 문제보다 먼저 눈가가 빨갰다.
예린이는 질문을 천천히 시작했다.
“언제부터 가장 힘드셨나요.”
그 질문에 여인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
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.

예린이는 휴지를 건네며 기다렸다.
의사는 해결책을 급하게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
이야기가 흘러갈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
예린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왔다.

진료가 끝난 뒤,
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.
“오늘은 피부보다 마음이 좀 나아진 것 같아요.”
예린이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.

퇴근길,
예린이는 병원 앞 가로수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.
초등학교 등굣길에 보던 나무들과
모양은 달라도 느낌은 비슷했다.
그때도 예린이는 늘 걷는 속도가 느렸다.
주변을 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.

집에 도착한 예린이는
샤워를 마친 뒤
습관처럼 일기장을 펼쳤다.

‘오늘은 손을 놓지 않은 날이었다.
말보다 침묵이 더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.
사람을 고친다는 말이
얼마나 조심스러운 말인지 다시 느꼈다.’

글을 쓰고 나니
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.
예린이는 이 시간이
자신을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.

가끔 예린이는
학생 시절의 자신에게
하나의 질문을 던져 본다.
“지금의 내가,
그때의 너를 실망시키지는 않았을까.”

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
아직도 완벽하지 않다.
하지만 분명한 건
초등학교에서 손을 들던 아이의 마음을
아직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.

예린이는
큰 성공을 꿈꾸며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다.
다만 매일의 선택 앞에서
조금 더 정직하려 애썼을 뿐이다.
조금 더 천천히,
조금 더 깊이 사람을 보려 했을 뿐이다.

이 이야기는
눈부신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.
대신 오늘의 태도가
내일의 사람이 되는 과정을
조용히 보여준다.

이 동화가 남기는 교훈은
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렵다.
사람의 인생은
결국 하루의 반복이라는 것.
그리고 그 하루를
어떤 마음으로 살아내느냐가
한 사람의 방향을 만든다는 것이다.

예린이는 오늘도
일기장을 덮고 불을 끈다.
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
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.

그리고 그 하루 역시
언젠가 누군가의 상처를 덜 아프게 하는
작은 이유가 되리라는 걸
조용히 믿고 있다.